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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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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사언 작시. 평시조.


2.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노력도 않고 신세 한탄만 하지말고 열심히 살라는 뜻.

3. 태산의 적용 : 이 작품은 사실적인 감각을 살리기 위해 현존하는 산의 이름을 빌려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예로부터 '태산'은 중국 산동(山東)에 있는 높고 큰 산(1,545m)으로 알려져 있다.

 

4. 양사언의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 는 그 자체가 원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한문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이므로 우리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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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시조란?

단시조(短時調) ·단형시조(短形時調) ·평거시조(平擧時調)라고도 한다. 3장 6구에 총자수 45자 내외로 된 정형시조이다. 매구의 자수 기준은 7∼8자이고, 종장 첫 구만 3자 고정으로 7 ·8 ⑺, 7 ·8 ⑺, 9 ·7의 음수율을 가진다. 또한 1구를 2분절하여 12분절로 된 3 ·4 ·3 ⑷ ·4, 3 ·4 ·3 ⑷ ·4, 3 ·5 ·4 ·3으로 대부분의 시조가 이에 속한다.

시조의 한 형태. 이 명칭은 창과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다. 원래는 창에서 그저 시조라고만 부르다가 뒤에 엇시조·사설시조 등 변조가 생겨 창이 분화되자 종래의 평탄한 가락의 시조를 ‘평시조’라 부르게 되었다. [요약] 시조를 음악상으로 나눈 하나의 형태.

[네이버 지식백과] 평시조 [平詩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 시조란?

우리 민족이 만든 독특한 정형시의 하나. 원래 노래의 가사로서 문학인 동시에 음악인 셈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시조는 고려말기부터 발달하여 왔다.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 시인 신광수(申光洙)가 쓴 <관서악부(關西樂府)> 15에서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排)한 것은 장안에서 온 이세춘(李世春)일세(一般時調排長短來自長安李世春)."라고 한 구절에 보이는 것이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뒤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쓰였음을 볼 수 있는데, 정조 때의 시인 이학규(李學逵)가 쓴 시 <감사(感事)> 24장 가운데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프다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주네(誰燐花月夜 時調正悽懷)."라는 구절이 있고, 이에 대한 주석에서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왕조 영조 때에 비롯된 것으로 보아 옳을 것이다.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있어서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短歌), 시여(詩餘), 신번(新?), 장단가(長短歌), 신조(新調) 등의 명칭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두루 혼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문학의 영향을 입어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즉 창가(唱歌), 신체시(新體詩), 자유시(自由詩) 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과 이시형을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부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時調詩型)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時調唱)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時調]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양사언?


楊士彦.
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양사언의 생애]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 평안남도 강동 지역)·함흥(咸興)·평창(平昌)·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의 군수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 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 황해도의 다른 이름)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한편,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사언 [楊士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태산가.

 

양사언의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한 작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泰山歌(태산가),  양사언(楊士彦)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 태산이 비록 높다하니 이 또한 산이니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 오르고 올라 그치지 아니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으리오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 사람이 몸으로 노력하지 아니하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 다만 산이 높아 오를 수 없다고 말하네

 

[감상]
유명한 시조인 태산이 높다하되를 한시로 바꾼 것이다. 사람이 산이 높다 말하고 오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따끔하게 이른 것으로 노력여하에 따라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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