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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시모음]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千弗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외딴 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대대포에 들다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

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천만

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

은 것일까 남긴 것 없이 남은 내 속의 물굽이들 소용돌이들 순천(順天)은 벌

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

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치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

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뱃전을

때리며 파도가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오늘도 갈대는 바람

에 흔들리다 말다 하였다

   

 

 

 

직소포에 들다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

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오래된 골목                                           

 

길동 뒷길을 몇 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無憂樹 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 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몽산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닿는다

언제 내 몸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교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바람을 맞다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나무

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소리 <마

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

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

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

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 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여름 한때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터

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루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 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오르고, 가파

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못                                                         
 
벽에다 못 하나 박았다. 벽이 울렸다.

박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벽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받으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박았다.
 
벽에서 못 하나 뽑았다. 벽이 울렸다.

뽑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마음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보내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뽑았다.

 

 

 

 

비 오는 날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Ⅲ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꿈에 대하여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 보이고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동서남북 가로놓여

너의 푸념 나의 푸념 머리 들 곳 없다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물불 안 가리고

여러번 죽고

여러번 태어나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 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우리와 함께 지병이 되어 앓고 있다.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삶에게 길을 묻다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물에게 길을 묻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물 속에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물 속에서 물만 먹고 살았지요

물 먹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물보라는 길게 물을 뿜어올리고

물결은 출렁대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돌을 던지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물소리 바뀌고 물살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웅덩이 속

송사리떼를 생각했지요

연어떼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물가의 잡초들을 힐끗 보았지요

눈비에 젖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生)도 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물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물 먹고 산다는 것은

물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물 먹고 살수록 삶은 더 파도쳤지요

오늘도 나는 물 속에서 자맥질하지요

물같이 흐르고 싶어, 흘러가고 싶어.

 

 

 

얼마나                                                   

 

고층 아파트에서 내다보면

아래 것들이 아주 작게 보인다 

하늘에서 보면 한통속일 내가 - 잠깐 

착각했을 뿐이다 

체중계에 올라서니 

몸무게 겨우 50 

나이 또한 50, 오공이라 … 

놀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직도 달고 있는 그 무게가 

불균형의 몸이... 오, 공이라! 

처음으로 잡힌 균형에 내가 다시 놀란다 

비온 뒤 여름날,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는다. 아파트를 향해 

니네들이 높다면 얼마나 높다고… 

보란 듯이 … 

 

 

 

 

어깨동무                                                

되면 한다는 사람보다

하면 된다는 사람이여.

……때문에라는 사람보다

……에도 불구하고라는 사람이여.

상실을 실상으로 보는 사람이여.

금지를 지금으로 보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위기가 위험이라는 사람보다

위기가 기회라는 사람이여.

아니다 아니다 하는 사람보다

그래 그래 하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오래된 가을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이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 간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진로를 찾아서                                         

 

眞露도매센터 빌딩을 몇 번 돌았다

불빛 환한 지하에서 두꺼비처럼 두리번거리며

예술의 전당 쪽 계단을 오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眞路는 어느 쪽일까. 길 눈이 어두워

進路를 찾지 못해 돌아나온다. 오후 7시

저녁 어스름이 내 빈 속에 꽉 들어찬다

저 불빛 저 그림자도 길게 누일 길 있던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깊어지는 가로등들,

모르는 곳에 제 속을 허문다

차소리에 쓸려 나무들은 한 쪽으로 기울고

닳을대로 닳은 길은

사람의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의 전당 무궁꽃에 기대어

한 사람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 길은 멀어서 하루가 짧고

담벽 너머 보는 지붕들이 뾰족하다

아무도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어

길 같은 길 어디 있냐고 투털대는 사람들이

자꾸만 비좁다며 바닥처럼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항상 끝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로여

나는 너에게 줄 미래도 없는데

내 의지는 소의 눈처럼 꿈벅거린다

누가 나를 시험하러 세상을 문제로 내놓은 것일까

어딘가 길 잃은 사람 있을 듯

낮은 구두는 아직 귀가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眞路 너무 아득해 빌딩 숲 헤쳐 닿을 길 없고

이 길 한 켠에서 생각나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 않은 길 하나씩 품고 있는 한줌 기대와 기대 속에 묻힌 한 그루

추억의 푸른 나무.

기대는 자주 우릴 셀레게 한다

설레임 속에서 새벽이 뜬 눈으로 돌아온다

비로소 진로란

우리들 생이 그렇듯

비뚤비뚤 하거나 비틀비틀한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마음의 경계                                             


새들이 또 날아오른다 더 멀리 더 높이

날개 몇 장 더 얹어 하늘로 간다 구름만큼

가벼운 것이 여기 또 있다

바람이 먼저 하늘을 스쳐간다

하늘이 땅을 한 번 내려다본다

땅에는 수많은 길들이 있다 땅은

같은데 길은 여러 갈래 길을

찾지 않고는 어떤 생도 없다

길 끝에 산이 있고 산 끝에 하늘이 있다

내 눈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하늘자리가

텅 비었다 하늘이 비였다고 공터일까

아니다 허공에는 경계가 없다 날마다

경계하며 경계짓는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

경계가 있다 경계 없는 하늘이 나는 좋다

허공에 새들을 풀어놓는 하는 새들이

길을 바꾸다 돌아 나온다 하늘이 한 울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나는 몇 번 구름을 잡았다

놓는다 가벼운 것들이 나를 깨운다

허공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맘속 경계선이 지워진다

 

 

 

 

새에 대한 생각                                                

 

새장의 새를 보면

집 속의 여자가 보인다

날개는 퇴화되고 부리만 뾰죽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몰래 중얼거린다

도대체 하늘이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따라갈 수 없다 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날고 싶지만

삶이 덜컥, 새장을 열어젖히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시작이란 그래,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지

새 중에서 제일 작은 벌새들도

이름없는 잡새들도

하늘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쥐싸대기 새파란 참, 새가

아, 안된다,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한다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인 것이다.

 

 

 

말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지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뜩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은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손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 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지혜                                                      

 

삶이  연습한다고

잘 살아가는 건 아닐 것입니다.

꿈을 가진다고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물이 흐른다고

다 깊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다고

다 좋아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끝에는 반드시

지혜가 따른다는 것을...

 

 

 

 

단 한 번                                                

 

 눈먼 새는 죽을 때 단 한 번 눈뜨고 죽는다는데 백조는 죽을 때 단 한 번 아

름다운 목소리로 울다 죽는다는데 가시나무새는 죽을 때, 가시에 가슴을 찔

리면서 단 한 번 울다 죽는다는데 달팽이는 일생에 단 한 번 교접을 한다는

데 일생에 단 한 번 번식하는 게도 있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도 여자를 못

본 수도승이 있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도 날지 않는 새들이 있다는데

 

 오직 사람만이 변신의 명수라네

 

 

 

 

마들에서 광화문까지                                  

 

광화문에 가려면 마들에서

노원을 지나 중계를 지나 하계를 지나

공릉을 지나 태릉을 지나 먹골을 지나

상봉을 지나 면목을 지나 사가정을 지나

용마산을 지나 중곡을 지나

군자에서 오호선을 갈아타야 한다

왕십리를 지나 행당을 지나 청구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을지로를 지나 종로를 지나가야 한다

입문하는 길이 이렇게 멀다

 

 

 

 

하루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그에게 묻는다                                         


하늘 보는 마음은 볼 때마다 같은데

볼 때마다 하늘은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볼 때마다 서울은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속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새는 죽을 때 한번 눈 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산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운명이라는 것                                         

 

파도는 하루에 칠십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사람의 일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침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고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를 돌아보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비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나의 잔                                                 

 

이태백 같은 시선(詩仙)은 술잔 속에서

달빛과 시를 건져냈는데 오마르 하이얌 같은

주성(酒聖)은 술잔속에서 루바이야트라는 언어의 보석을

건져냈는데 어떤 시인은 술잔 속에서 수평선을

건져냈는데 나는 내 술잔 속에서 내 얼굴 하나도

건져내지 못했다. 내 손으로 내 잔을 채웠을 뿐이다.

 

 

 

 

머금다                                                  

 

거위눈별 물기 머금으니 비오겠다

충동벌새 꿀 머금으니 꽃가루 옮기겠다

그늘나비 그늘 머금으니 어두워지겠다

구름비나무 비구름 머금으니 장마지겠다

청미덩굴 서리 머금으니 붉은 열매 열겠다

사랑을 머금은 자

이 봄, 몸이 마르겠다

 

 

 

 

하나밖에 없다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뒷길                                                      


뒷길은 뒤에 가기로 하고 앞길을 먼저 따라갔습니다

샛길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길은 몇갈래 가다가 멈춘 길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지평선 하날 당겨 먼 세계를 적었습니다


나아가려면 우선 물러서라는 말이

進과 退의 처세법임을 그때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곧은 것은 쉽게 부러지나 굽은 것은 휘어진다고 말들 하지만

구부러지면 온전하다는 저 곡선의 유연함 저 내밀함······


놀라운 것은 감추면서 드러내는 그것이었습니다

길 없어도 세상은 새길을 만들고

사람들은 바쁘게 나를 앞질러 갔습니다


옛길이 언제 새길을 내려놓았겠습니까

가파른 길 내 길처럼 걸어갈 때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멀리 가야 많이 본다는······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길의 모든 것은 걷고 싶지 않아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들판 너머 길 하나 산 너머 길 바라다봅니다

길의 끝은 멀고 그리고 가파릅니다


고갯길은 힘든 그 어떤 것도 넘겨주질 않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길을 넘었습니다


고갯길을 벗어나도 벗지 못하는 업도 있습니다

눈부신 햇살도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다시 쓰고 싶은 생이 있겠습니까


앞길밖에 길이 없겠습니까 가다 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오래 기다린 뒷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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