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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구미 각국의 연주여행과 레코드를 통하여 비범한 테크닉, 깊은 음악성, 광범위한 레퍼토리가 인정되어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았다.

 

출생-사망 1915.3.20 ~ 1997.8.1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우크라이나 지트미르
주요수상 소련 피아노콩쿠르 우승(1945), 스탈린상(1950), 레닌상(1961)

 

우크라이나의 지트미르 출생. 아버지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오데사음악학교에서 지휘법을 배우고 한때 오데사 오페라발레극장의 관현악단 단원으로 있었으나(1934∼1937), 1934년 최초의 독주회를 가진 뒤 피아니스트로 입신하기로 결심하고 1947년까지 모스크바음악원에서 G.G.네이가우즈에게 사사하였다.

1945년 소련의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이어서 프라하의 음악제에 출연하여 ‘현대의 리스트’라는 격찬까지 받았다. 그후 구미 각국의 연주여행과 레코드를 통하여 비범한 테크닉, 깊은 음악성, 광범위한 레퍼토리가 인정되어 당대의 명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1950년 스탈린상, 1961년에는 레닌상 및 소련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았다. 1994년 4월 내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협연과 독주회를 가진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Svyatoslav Teofilovich Rikhter]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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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연주자 열전

리히테르

피아니스트

[Sviatoslav Richter ]

출생 - 사망 1915.3.20. ~ 1997.8.1.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일구어낸 삶과 업적을 하나로 설명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라는 단어만큼은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표현일 것이다. 레코딩을 끔찍하게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음반을 남겼다. 그의 공식적인 디스코그래피는 지금까지도 계속 확장되고 있을 정도로, 정규 레코딩 외에 많은 방송 녹음들과 개인 녹음들이 지속적으로 발매되어 피아노 애호가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자기 홍보를 위한 인터뷰나 영상물 제작을 극도로 혐오(브루노 몽생종이 그의 기록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그의 사생활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열광적인 사진광이었다. 더군다나 인간적으로도 그는 대단히 복합적인 성격으로서 유목민적이고 일중독자에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단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음악 취향에 있어서도 그는 카라얀의 음악 해석에는 이해할 수 없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탐미적이면서도 장중한 해석에 있어서는 늘 찬사를 보냈고, 글렌 굴드의 바흐는 참신하다고 높이 평가했지만 그 외의 작품에서는 자기도취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러시아인이자 독일인이었던 그는 순진한 동시에 삐딱하기도 했고, 예측할 수 없는 성격임과 동시에 완고하기도 했다.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스핑크스와도 같은 광적인 열기를 자아내다가도 근엄한 사제와도 같은 엄숙함과 어린이와도 같은 천진난만함을 오고간다.

불연속의 연속 - 역설의 오묘한 조화

역설적일 수록 리히테르에 대한 평론가들과 청중들의 반응은 더욱더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 수록 그에 대한 우상화의 기운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던 그가 서방인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부터,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리히테르의 존재를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리히테르는 웅혼하고 강건한 음악으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미다스의 손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손 대는 모든 작품들은 철저하게 분석, 재구성되어 ‘리히테르화한 에너지’에 휩쌓인 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항상 기준 이상의 포르테로 일관했지만, 그 포르테는 리히테르 자신에게는 극도의 포르티시모를 위한 작은 피아니시모였던 것이다. 이렇게 쌓아올린 저 엄청난 음향의 구조물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창조적인 힘을 발산했던 리히테르에 대해 어떠한 반론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딘가 자신을 속인다는 느낌까지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할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저 넓은 20세기 피아노 세계의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거인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 세 명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거인으로 발돋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꼽는 첫 번째 아버지는 바로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네이가우스가 누구인가? 그는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서 에밀 길렐스, 야코브 자크, 이고르 쥬코프, 안톤 긴스부르그, 엘리소 비르살라제, 알렉세이 루비모프, 라두 루푸등을 길러낸 현대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부라고 말할 수 있다.

리히테르의 재능을 알아채린 뒤 아버지처럼 그의 곁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고 이끌어주었던 스승으로서, 네이가우스는 낭만적이면서도 부드러우며 상상력 풍부한 옛 피아니즘 성향이 강한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한테는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고 텍스트에 담긴 그 의미와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리히테르의 그 방대한 레퍼토리와 작품에 대한 투철한 분석, 냉정한 감정 조절, 풍부한 상상력은 바로 네이가우스의 아버지와도 같은 넓은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그를 낳아주고 음악으로 이끌어준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고, 세 번째로는 바로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언급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에게 있어서 1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던 정신적인 아버지였던 것이다.

사색하는 음악을 통해 호소력을 이끌어내다

음악은 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사색의 세계다. 소리, 음색, 악기, 악보, 연주자, 작곡가, 그리고 음악. 연주의 기본 이념은 이들 모두를 조화시켜 소리로 표현해 내는 실현행위다. 연주가란 무엇인가? 이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며 모든 요소에 매어져 있는 사슬을 긴밀하게 조여가는 주체다. 리히테르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가지고 있다. 순간 속에서 단 한 번 울리고 사라지는 바로 그 소리의 깊은 호소력을 끌어낼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이다. 그는 음악의 본질을 캐어내는 과정을 피아노를 통해 심사숙고한다. 그 결과 그가 발견하는 것은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연주가 어떻게 그 곡의 본질을 지시할 수 있는 가이다. 자유로운 음악 만들기를 통해 한 순간의 시간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그를 변덕스럽고도 고집스러운 음악가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일 것이다.

참된 음악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낸 전형적인 러시아인인 리히테르는,러시아 전통 피아니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고전과 낭만, 혁신과 보수, 감성과 이성, 러시아와 유럽, 피아노와 오페라 사이에서 자신만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 작곡가 의도에 충실한 음악세계를 만들어나갔던 리히테르의 연주는 러시아적이라기보다는 구조주의적이었다. 또한 현대적이되 자아도취적인 낭만적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현대적 도취감이 즉흥적 파생물이 아니라자신의 존재방식을 지키기 위한 고집스러움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엄격한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히테르에 대한 글렌 굴드의 언급만큼 정확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연주를 연결고리로 작곡가와 청중들을 매개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작품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도 보여준다.”

리히테르의 초상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네이가우스와의 만남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15년 3월 20일 우크라이나의 지토미르에서 태어난 리히테르는 그리그와 슈레커와 친분이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오르가니스트인 폴란드-독일계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환경을 받을 수 있었다. 시민 혁명 이후 오데사로 가족이 집을 옮긴 뒤 리히테르는 미술과 문학, 영화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의 연주에도 아버지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것만을 배웠을 뿐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워나갔던 그는 14세에 오데사의 한 해군클럽에서 피아노 반주를 시작했다. 15세에는 엄청난 양의 오페라 악보를 읽어나가며 오페라 리허설 반주에 몰두했으며, 18세 무렵에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발레연습 반주를 할 수 있었다.

1934년에는 기본 피아노 레퍼토리를 배우지도 않았고, 전문적인 연습도 없었던 그로서는 대담한 시도라고 말 할수 있는, 쇼팽 리사이틀을 오데사의 기술자 클럽에서 열었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프로 연주자로 발돋음했다. 그러나 오데사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반 독일정서로 인해 모스크바로 떠났고, 바로 여기서 피아니스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만나게 된다.리히테르는 이미 오데사에서 네이가우스의 연주를 듣고 그의 비상하는 듯한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이와는 반대로 1937년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은 네이가우스 역시 너무도 감동한 나머지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을 도와준다.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자 독일인 아버지를 둔 네이가우스는 후일 리히테르로부터 ‘친숙한 중립성’을 배웠다고 토로한바 있다. 그 만큼 리히테르는 작품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스타일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주관을 객관화시키는데 천부적이었다. 2차대전 중 아버지가 총살을 당하고 어머니는 독일로 떠나버리자, 네이가우스는 리히테르의 아버지의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리고 1942년 6월에는 정식 리사이틀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청중들은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당당한 기운, 엄청난 테크닉에 압도되었다. 1944년 리히테르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련의 각종 연주회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소련의 예술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피아니스트로서 소련 내 최고의 연주자로 손꼽히던 그는 1952년에는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를 소재로 한 영화에 리스트로 분장하고 출연한 독특한 경력 또한 가지고 있다.

철의 장막, 소련에서 벗어나다

리히테르는 스탈린이 서거한 뒤 19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사회적 변화에 부응해, 철의 장막에서 벗어나 서방 세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0년 미국으로의 첫 연주여행(이전에 미국에 선보인 에밀 길렐스가 “리히테르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로 언급한 것은 유명하다)을 떠나 병적일 정도로 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1961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에도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있는 전설로서 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음악 외 것들은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1970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의 미국 연주회에서 반공주의자들의 난동으로 연주회가 중단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에서 연주회를 가지지 않았다. 대신에 동서유럽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왕국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디스코그래피는 지금까지도 확장되고 있을 정도로 정규 레코딩 외에 많은 방송 녹음들과 개인 녹음들이 지속적으로 발매되고 있다.

프로코피에프와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리스트와 쇼팽,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정통 레퍼토리, 독일과 프랑스의 바로크와 고전, 현대 및 프랑스 작곡가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포함한 피아노로 가능한 모든 솔로 및 협주곡 레퍼토리가 그의 손끝에서 연주되었다. 그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음악 만들기를 사랑했다. 그 만큼 실내악과 앙상블 작업은 그의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가장 먼저 소비에트 시절 함께 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앙상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이들은 새로운 러시아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해낸 트로이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 그와 절친한 사이었던 벤자민 브리튼과의 연주도 60~70년대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이벤트이고,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가곡 반주자(후일 페터 슈라이어와도 함께 했다)로서의 활동 또한 역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젊은 음악가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 특히 후배 피아니스트인졸탄 코치슈, 엘리자베스 레온스카야 등을 각별히 아끼며 함께 듀오 리사이틀도 열었고, 바이올리니스트 올레그 카간, 첼리스트 나탈리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와 함께 실내악 연주와 듀오 리사이틀 또한 자주 가졌다. 그리고 전문 실내악 단체인 보로딘 4중주단과도 많은 연주회를 했다. 거구의 몸으로 청중을 압도했던 그는 말년에는 홀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악보를 앞에 놓은 채 건반 옆에 단 하나의 조명만 놓고 연주하는 분위기를 선호했다. 이는 청중에게는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자신에게는 악보 그 자체에 대한 집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리히테르가 남긴 방대한 양의 레코딩

레코딩 또한 평생에 걸쳐 엄청난 양을 남겼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았던 지휘자 므라빈스키와 더 많은 녹음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가 칭송해 마지 않았던 카라얀과의 베토벤 [3중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비록 당시 해석에는 마음 들어 하지 않았지만)을 비롯하여 지휘자 마타치치와의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과 지휘자 비슬로키와의 [라흐마니노프 2번]을 비롯하여 엄청난 양의 협주곡을 레코딩했다. 전혀 다른 작품들로 80개 이상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고 자랑했던 독주곡 레퍼토리에서는 정리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레코딩이 남아있다. 특히 러시아 레퍼토리, 슈만이나 리스트 같은 낭만주의 시대 작품, 빈 고전파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준 바 있다.

글렌 굴드는 리히테르가 레코딩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없어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많은 녹음을 진행한 베테랑 연주가이기도 한 리히테르는 레코딩의 완성도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많은 양의 라이브 레코딩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는데, 이 많은 음반들 어느 하나 리히테르의 카리스마와 진지함이 배어있지 않은 음반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 1995년 뤼벡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뒤 청력 이상으로 은퇴를 한 리히테르는 2년 뒤인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올리스트 바슈메트의 연주와 지인들의 추모를 받으며 교회에서 간소한 장례식을 거친 그의 유해는 생전에 친분을 나누었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밀 길렐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의 거장들이 묻힌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약력

  • 1937 모스크바 음악원 네이가우스 문하로 입학
    1940 모스크바 공식 데뷔 연주회
    1945 러시아 음악 콩쿠르 1위
    1950 스탈린 상 수상
    1958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 실황
    1960 첫 미국 연주 여행
    1961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 데뷔 연주회
    1994 서울 예술의 전당 내한 연주회
    1995 뤼벡에서의 마지막 연주회 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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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11. 01. 20.

출처

제공처 정보

  •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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