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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

낭만파의 선구자 격인 음악가.

젊어서는 작곡보다는 피아노로 이름을 날리려고 하는 열망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뛰어난 피아노 교사 비크의 문하에 들어가서 대단한 양의 연습을 소화했다고 하는군요.

스스로 약지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끈에 손가락을 매달아서 연습하는 특이한 연습법을 고안할 정도로 집요하게 연습에 매달렸었는데, 너무 무리한 연습이 오히려 화가 되어 손에 마비증상이 오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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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크에게는 클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클라라 비크는 비크의 문하에서만 으뜸가는 실력의 제자였던게 아니라 세계(당시 유럽에서겠죠)적으로도 그 명성이 뛰어났던 피아니스트였답니다.

비크에게는 이런 딸이 대단한 자랑이었죠.

그런데 그만... 비크의 문하에 있으면서 비크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슈만과 클라라가 사랑에 빠지게 된것입니다.

아버지 비크의 입장에서는 손도 성치 못해 장래도 불투명한 제자에게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는 자랑스러운 딸을 절대로 내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클라라가 어느 정도로 명성이 대단했던가 하면, 아홉살이던 1828년에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졌었고, 이후 국외연주회만 38회에 이르는 당대에도 손꼽히는 명피아니스트였었습니다.

당대의 문호 괴테, 바이올린 마스터 파가니니, 멘델스존, 피아노의 귀재 리스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클라라의 피아노를 극찬하고 여러 귀족들의 후원도 받고 있었죠.

이런 딸이, 피아니스트로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고 작곡가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슈만과 결혼하겠다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극렬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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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위였는데... 결국 3년에 걸친 투쟁은 법정까지 가게 되었죠.

법정에서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법정의 허가를 받아내게 됩니다.

결혼 당시에는 클라라가 아까웠던 결혼이지만, 이 결혼은 당대의 두 재능의 결합이라는데서... 음악사에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피아니스트로 대성하겠다는 꿈을 접은 슈만은 독일 가곡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는 클라라를 위한 곡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슈만이 작곡한 피아노 곡들도 클라라에 의해 초연되어 세상에 알려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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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뒤에 덧붙여서... 로맨스라고 하기는 너무 순수하다고 해야할,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의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

젊은 작곡가 브람스를 메이저 무대로 소개시킨 사람은 당시 작곡과 비평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독일 음악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슈만이었습니다.

슈만은 브람스를 자기가 발간하던 음악잡지에 크게 소개하여 그의 존재를 널리 알렸죠.

브람스는 이런 슈만을 아버지처럼 생각했고, 이 후 슈만이 정신병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며 집안을 돌보지 못할때 브람스는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정성껏 돌봤습니다.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의 편지를 후세에 연구한 바로는 클라라는 어땠을지 몰라도 브람스는 선배의 아내이자 연상의 클라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하는군요.

1896년에 클라라가 죽고나서...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았던 브람스도 '네 개의 엄숙한 노래' 를 클라라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하고, 클라라가 죽은 뒤 1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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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온 내용입니다,ㅋ

 

                                                                                                클라라와 브람스의 초상화

요하네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너무도 열정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랑을 평생 갈구하였으며 사랑을 지켜나간 너무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특히 그의 사랑 중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은 그의 예술가적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게 한 사랑으로 그가 클라라를 만난 순간이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수만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브람스가 함부르그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고, 브람스는 그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요하임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으나 그 후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슈만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용기를 내어 그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오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그 후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하루도 그의 작품에 관한 찬사가 없는 날이 없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시 피아니스트로서 서른 네 살이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만 그의 온 정열을 쏟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다시금 진정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전환기를 가지게 된다.

 

 


우정과 존경은 사랑으로 변하고

1853년 슈만이 정신병이 악화되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1854년 3월 4일 슈만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작품8)을 들려주고 이윽고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작품9)을 작곡했다.

 

이 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우정과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불타는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편지를 통해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상기시켰고 자신은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클라라 역시 브람스와의 관계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많은 기쁨을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람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의 영혼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와 자신이 음악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은인이요 친구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충실해야겠다는 소망 사이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폭풍과 같은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

당시 착상한 광포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하고 있다.

 

"자, 이제 막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느니 말야."

 

하지만 다행이도 그를 이런 악몽과 같은 내면의 싸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즉 1856년 7월 마침내 슈만이 죽은 것이다. 슈만 사망 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의 양육과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이 커갔다.

 

그런 중에 그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험'(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이처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침착하나
더욱 깊이 있는 사랑의 공감으로 변해갔고, 외부의 장애가 사라지고 그가 자유롭게 클라라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여성이 없었을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여성도 클라라와 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뇌졸중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가졌고, 예술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 7일 완성하였다.

이 네곡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이 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

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Brahms, Johannes, 독일 함부르크,1833.5.7~189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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