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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하고 소멸하는 이준용의 ‘곰팡이-조각’

류병학(미술평론가)

 

당 필자, <류병학의 미술학교> 첫 연재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뒤샹의 <샘>이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일까? 왜 허스트의 일명 ‘해골’이 현존작가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것일까? 궁금하지? 바로 그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자 <류병학의 미술학교>를 지면(紙面)에 ‘건축’한 것이다.”

 

기억하시죠? 필자는 그동안 연재를 통해 왜 뒤샹의 <샘>이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인지 그리고 왜 데미안 허스트의 일명 ‘해골’이 현존작가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것인지 류병학의 ‘개똥미학’을 통해 언급해 보았다. 오잉? 그렇다면 <류병학의 미술학교>는 끝난 것인가? 아니다! 이제부터야말로 <류병학의 미술학교>는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나가면서 필자는 미녀삼총사의 변화하는 작품/사물을 무엇보다 뒤샹의 <샘>에서부터 하임 스타인바흐의 상품들(냄비, 탁상시계, 램프 등)과 달리 절대적인 고유한 예술작품으로 박제되지 않기 때문에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 이후 가장 급진적인 미술개념이라고 중얼거렸다. 오늘 필자가 동양일보 독자 여러분께 소개할 작품은 어느 특정의 형태로 박제시킬 수 없는 작품이다.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가 바로 그것이다.

 

왼쪽) 이준용 <누룩> 메주에 곰팡이, 25x31x23cm. 2009

오른쪽) 이준용 <유산균> 치즈에 곰팡이, 25x31x23cm. 2009

 

지난 연재에서 언급

했던 데미안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작품이다.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는 해골에서 곰팡이가 번식하는 작품이다.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를 언급하기 전에 그보다 먼저 제작되었던 <누룩>과 <유산균>을 먼저 살펴보자. 이준용의 <누룩>과 <유산균>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메주(누룩)과 치즈(유산균)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곰팡이는 햇빛이 없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 따라서 마치 뱀파이어처럼 곰팡이에게 햇빛은 ‘독(毒)’이다. 글타! 곰팡이는 인간에게 해롭기도 하지만 이롭기도 하다. 알렉산더 플레밍의 페니실린 약물은 곰팡이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곰팡이균(Aspergillus niger)은 시트르산, 글루콘산 등의 복합물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또한 곰팡이는 음식, 즉 간장과 된장 그리고 치즈나 소시지를 만들기도 한다.

 

왼쪽) 이준용 <누룩> 메주에 곰팡이, 25x31x23cm. 2009

오른쪽) 이준용 <유산균> 치즈에 곰팡이, 25x31x23cm. 2009

 

 

이준용의 <누룩>과 <유산균>은 바로 작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메주와 치즈로 만든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준용은 동양과 서양의 발효식품인 메주와 치즈를 이용하여 일명 ‘메주-이준용’과 ‘치즈-이준용’을 제작했다고 말이다. 대한민국의 3대 장(간장, 된장, 고추장)의 기본재료가 메주이다. 그리고 치즈(cheese)는 우유 속에 있는 카세인을 뽑아 응고 발효 시킨 식품이다. 따라서 서양의 치즈는 동양의 메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곰팡이는 다른 식물과 달리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곰팡이는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곰팡이는 영양분을 포함한 다른 생물 내지는 무생물(물건 등)에 기생하여 산다. 흥미롭게도 이준용의 ‘곰팡이-조각’ 역시 숙주(host)에 기생한다. 흥미롭게도 곰팡이는 ‘메주-이준용’과 ‘치즈-이준용’에 기생하여 버섯처럼 포자로 번식한다. 말하자면 곰팡이는 ‘메주-이준용’과 ‘치즈-이준용’의 영양분을 빨아먹으면서 번식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준용의 ‘곰팡이-조각’은 고정된 조각이 아니라 변화하는 일종의 ‘생태미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생태미술은 야생의 사유(La pensee sauvage)로 야생의 미학을 지향한다. 이를테면 ‘야생의 사유’는 생태적 사유, 즉 자연과 더불은 사유를 뜻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생태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더불은 생태환경은 자연과 문화를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족적인 관계로 본다.

 

일명 ‘곰팡이-조각’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는 소멸되어 버리는 리사이클링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이준용의 작품은 모든 것을 자본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 즉 자본주의에 포착되지 않는 작품이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자본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작품은 박제된 작품인데, 이준용의 작품은 자연처럼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 소멸되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정미술(Process Art)이나 대지미술(land art) 그리고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등은 이준용의 ‘곰팡이-조각’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보존의 문제를 갖는다. 따라서 그러한 작품들은 작품판매의 문제를 흔히 사진이나 영상으로 대체한다. 그렇다면 곰팡이가 피어나는 광경을 인터벌 사진으로 촬영하여 제작한 영상 작품인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는 물질적 작품의 ‘대체물’인가?

 

이준용 <아름다운 지구> 디지털 프린트. 2009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는 해골을 제작하여 PDA(Potato Dextrose Agar) 배지와 쌀풀을 섞어 붙여 곰팡이를 피게 한 작품이다. 배지는 미생물이나 동식물의 조직을 배양하는 배양액을 말한다. 배지의 종류도 100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PDA 배지는 세균보다는 주로 곰팡이나 효모를 키우는데 사용되는 배지라고 한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신의 사랑을 위하여 (For the Love of God)> 2007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는 죽음의 상징인 해골을 만들어 곰팡이를 피게 만든다. 따라서 이준용의 <아름다운 지구>는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처럼 죽음이 삶과 대립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이다. 물론 이준용의 ‘곰팡이-조각’과 허스트의 일명 ‘죽음’ 작품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허스트의 ‘약’ 시리즈가 시각적인 것으로 그치는 반면, 이준용의 ‘곰팡이-조각’은 시각을 관통한 생태로 확장된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은 작가 자신도 컨트롤 할 수 없는 ‘우연적 번식’을 뜻한다. 한 마디로 이준용의 작품은 ‘어디로 튈지 당신 자신도 감 잡을 수 없다’고 말이다.

 

어쩌면 필자의 해석에 허스트가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일명 ‘죽음’ 작품들이 예술과 종교 그리고 과학이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머시라? 허스트가 거기에 ‘사랑’을 덧붙여 달라고 할 것 같다고요?

 

하지만 허스트는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는 자본주의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따라서 그의 삶(작품)은 산소(사랑)과 양분(경제) 그리고 온도(경영) 없이는 온전히 논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허스트는 대다수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마치 음지(자본주의)에서 자라나는 곰팡이처럼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반면 생성하고 소멸하는 이준용의 ‘곰팡이-조각’은 (자본주의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날 종교와 현대예술 그리고 현대철학과 달리) 자본주의의 욕망을 ‘부패’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준용의 작품은 마치 곰팡이처럼 자본주의에 ‘기생’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아티스트의 덕목은 무엇일까? 아티스트는 욕망의 산소를 마시기에 급급하지 않고 사랑의 산소를 마시는 자가 아닐까? 아티스트는 자본의 양분을 섭취하는데 혈안 되지 않고 정신의 양분을 섭취하는 자가 아닐까? 아티스트는 비열한 꼼수를 펼치기보다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는 자가 아닐까?

http://www.dynews.co.kr/detail.php?number=87187&thread=12r20

 

 

소낭구 ---

 

정답은 아니지만 그럴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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