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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 어려운 건 저널리즘 때문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여성주의 저널 일다> 금오해령

얼마 전 런던의 테이트 현대 미술관에 들렀다. 이 곳에 방문할 때마다 미술 수업이나 미술 숙제를 하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었는데, 이 날은 선생님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7, 8세 정도의 학생들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은 아름다워요”, “여기 이 사람은 몸이 이상하게 꼬였어요”, “이건 뭔지 모르겠어요, 이상해요.”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난해하기로 이름난 현대미술 대가들의 작품이 들어선 미술관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아이들을 보니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외친 소년에 대한 동화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 체면을 차려야 하는 성인들에게, 현대 미술은 그런 식으로 느낀 것을 그대로 말하기에는 뭔가 특별하고 어려운 것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프로이트의 경제원칙에 입각한 반동형성적 요소, 말하자면 동일한 리비도의 양으로 동시에 결정가능한 양가 감정이 공존하거나 라캉의 ‘이중 기만’, 즉 양면적인 현상으로서 유혹하는 오브제라는 에로티시즘의 표현 기능, 그리고 들뢰즈의 ‘이중 긍정’과도 그다지 먼 개념은 아닐 것이다.”

위의 인용구는 한국의 한 미술잡지에 실린 작품평론의 일부이다. 이 문장이 말이 되는지, 혹은 필자 스스로가 이 문장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러한 수사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디자인 하우스 1996)의 저자 에프라임 키숀은 이러한 평론과 알 수 없는 현대 예술들을 두고 통렬한 비판과 풍자를 던진다.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천문학적인 작품가격과 알 수 없는 평론으로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예술을 사랑한다는 키숀에게도 소위 예술 전문가들의 설명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건강에 해롭기까지 글들이다.

“나는 요즈음 의사의 지시로 현대 예술에 대한 평론은 거의 읽지를 못한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 읽을 정도이고 그나마도 공복 상태에서는 전혀 읽지 않고 있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그는 "봐서 이해가 안 되는 예술품은 순전히 저널리즘적인 것이다"라는 다다이즘의 선언을 인용하며 평론가들의 권위와 미술품시장에 많은 부분 좌우되는 현대미술의 기만성을 비판한다. 현재에 와서 현대 미술에서는 시선을 끌기 위한 의미 없는 기획들이 재생산될 뿐, 아름다움이란 도무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지속된 그의 현대미술 비판들을 통해서 그는 많은 ‘대중’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많은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예술 이해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예술을 모르는 속물’ 취급을 받아야 했다.

이 책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사례들 중에 “몰래 카메라 사건”이 있다. 침팬지가 물감으로 마구 칠한 캔버스를 <제3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전이라는 어느 부자마을의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이름난 미술관의 관장과 예술 비평가들, 즉 예술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해프닝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되었지만 그들의 기만성을 폭로하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고 말았다고 한다.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현대예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겁에 질려서 “나는 전혀,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외칠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피카소가 자신의 유언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비웃었다는 가정에서 나왔다. 키숀에 따르면, 실제로 재능으로 충만했던 피카소는 대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저 뭔가 자극을 원하는 시대와 영합했을 뿐이고, 이 유언장에서 그러한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피카소의 유언장 중에서 -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이 모호한 유언장을 피카소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현재 피카소가 스스로 기대했던 것 그 이상, 혹은 뭔가 다른 것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여름 피카소의 출생지, 스페인 말라가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 필자는 무슨 신전이나 왕궁의 핵심에라도 입장하는 인상을 받아야 했다. 소지품들은 모두 보안 검색대를 통해야 하고 곳곳에 무전기를 찬 검은 양복의 보안요원들이 배치되어 있는, 그 피카소만을 위해 준비된 미술관은 위엄마저 넘쳐 흘렀다. 이제 피카소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그림값과 이름값, 그리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미술사에서의 권위로 남은 듯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경계하게 되는 것은, 예술이 부와 고상함, 그리고 학식을 상징하는 차별화에 이용됨으로써 특정 집단, 특정 계급의 전유물로 독점화된 채 머무르는 것이다. 단순히 미술작품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의 예술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간의 삶과 정서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점점 더 알 수 없다고 느끼며 ‘전문가’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더구나, 키숀도 지적하듯이, 적지 않은 국민의 세금이 ‘오늘날의 예술’을 지원하고 구입하는데 쓰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이분법을 반복하는, 자칭 ‘골수 보수주의자’인 키숀의 명제에 완전히 동의하거나, 가끔 지나치기까지 한 그의 조롱에 모두 맞장구를 칠 필요는 없다. 단지 수십억을 호가하고 저명한 언론으로부터 극찬 받은 작품에 딱히 감동 받지 않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부족한 문화적 소양 탓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 예뻐요”라고 외치는 여덟 살짜리의 어린 아이처럼 솔직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한 작품을 통해서 어떤 종류의 감동을 얻는다면 그것이 원래 그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가치라는 것, 그리고 그 가치는 관객에 의해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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